내가_OO_못하는_이유/내가 잠을 못자는 이유

아빠의 아빠의 영면

의 19호실 2020. 11. 10. 22:38

아빠의 아빠, 할아버지께서 영면에 드셨다. 고로 이건 조문객의 발길이 멈춘 늦은 밤에 잠깐 시간 내어 쓰는 글.

상주는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원칙하에 아빠를 제외한 가족들과 조문객들은 잠시라도 잠을 자기 위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눈코 뜰 새 없이 조문객을 맞느라 정신없던 상주에게 여유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그리고 위패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에만 서있느라 영정사진을 옆에서만 바라보았던 상주는 그제야 정면에서 고인의 영정사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상주,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느낀 것들.

1) '우리 아빠가 언제 저렇게 왜소해졌지?'
원래도 타고난 체형이 마른 분이셨지만, 오늘따라 더 말라 보이셨다. 아무래도 검은 양복 때문인 것 같다.
그동안 내게 블랙 정장은 내 통통한 체형을 가려주는 옷이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의 까만 정장은 체형을 말라 보이게 하는 걸 넘어 또 다른 효과를 주는 듯했다. 괜히 더 왜소해 보이게 하여,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다 못해 쪼그라들어 보이게 하는 효과. 그리고 얼굴과 달리 슬픔을 표현할 줄 모르는 육체를 감춰줌으로써, 조문객들이 유가족의 얼굴에 집중하게 하고 그들의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하는.
검은 양복, 할아버지의 마지막 사진,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빠의 힘없는 뒷모습. 여태 울지 않았는데 괜스레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것들.

Pixabay 무료 이미지


2) '두 분만의 오롯한 시간을 빕니다.'
그런 아빠를 뒤로하고 나 역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아빠의 뒷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빠를 두고 나와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빠와 할아버지, 두 분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문객들과 다른 가족들이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정작 아빠가 할아버지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제대로 건네지 못한 듯하여. 
무뚝뚝한 아빠가 적막의 시간 동안 그의 슬픔, 아쉬움, 원망, 그리움 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며 자리를 비워드렸다.

3) '멋대로 재단하지 말 것'
사실 부끄럽지만 고백 하나 하자면, 나는 할아버지와 다소 멀고 얇은 관계로 지내왔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고 이해하기 어려워서. 
뭘 모르면 용감하다고, 그래서 때로는 부모님과 조부모님 사이의 일에 대해 함부로 판단했다. 
그런데 오늘 아빠의 한숨 섞인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할아버지였을지라도, 아빠에겐 하나밖에 없는 아빠였음을.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두 사람만의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한마디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과 관계에 대해 멋대로 재단하는 것만큼 무용한 일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아빠.
내게 아빠가 소중하듯  
아빠에게도 소중했을 '아빠의 아빠'...
그래서 나도 아빠도 잠 못 드는 밤.